[09.14] 교육부 원격수업 제한 폐지 발표에 대한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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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균관대분회 작성일20-09-14 11:06 조회3,567회 댓글0건본문
지금 우리는 역병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방역 전선에서 누군가 일탈하면 다른 누군가의 고통은 몇 배로 가중된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고통을 분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자기 몫의 고통을 견디고 있는 중이다.
2020년 대학의 1학기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교육부는 개강초 2주간의 원격강의를 권장했다가 수시로 연장하여 결국 한 학기 내내 원격강의를 권장하게 되었고, 원격강의 지침마저 뒤늦게 수립했다.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원격강의를 시작한 대학은 서버가 다운되거나 실시간 강의가 해킹되는 사태까지 겪었다. 중구난방의 지침과 부족한 인프라 속에서도 교강사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학생들은 정상수업에 비해 열악한 강의를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19로 인한 미증유의 사태 속에, 이 모든 고통도 우리가 기꺼이 분담해야 할 몫으로 알았다.
코로나19 상황에서도 고등교육이 좌초되어서는 안 되기에, 원격수업이라는 비상 엔진으로라도 우선 항해하면서 피해를 차근차근 정비하고 수리해야 했다. 멀쩡한 방과 쓸 만한 장비가 없어 고통받는 비정규교수와 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인프라를 제공해야 했다. 개인적으로 확보하여 활용한 인프라에 대해서는 부담을 경감해줘야 했다. 콘텐츠 제작의 배우와 피디와 편집자의 역할마저 수행하느라 몇 배의 고통을 겪은 교강사의 추가 노동에 보상해야 했다. 정상수업을 듣지 못하고 대학 시설을 이용하지 못한 학생들의 학습권 손실에도 보상해야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논의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했다.
교육부는 교강사와 학생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 아닌가.
9월 9일 교육부에서 미래교육 전환을 위한 혁신지원 방안을 발표하며 앞으로 원격수업 제한을 완전히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코로나19가 끝나더라도 지금과 같은 원격수업을 지속할 법령과 규정을 만들어내겠다는 것이다. 대규모 강좌 확대와 인터넷 강좌 증설은 비용절감을 추구하는 대학들의 숙원사업이었다. 고등교육의 공공성을 수호해야 할 행정부가 대학의 민원 해결사로 자처하고 나섰음이 확인되었다. 비상 상황에서도 이익 확대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교육부와 대학의 일탈 행위 앞에, 교강사와 학생들이 누구를 믿고 가중되는 이 고통을 견뎌내겠는가.
교육부는 규제 샌드박스라는 말장난을 부렸다. 최소한의 고등교육 공공성이라도 지켜보자고 합의한 법령과 규정의 보루를 무너뜨리고, 대학 당국이 이익의 샅바를 맘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는 모래판을 만들어주겠다는 것이다. 합의가 낡았다면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합의를 의논하는 것이 옳다. 교육부는 합의를 규제라고 규정하여 다시 우리 고등교육 전체를 좌초시킬 거대한 위기의 구멍을 뚫고 있다.
2020년 대학에서의 2학기는 더욱 혼란스러울 것이다.
얼마나 지속될지 예측할 수 없는 원격수업이라는 비상체제 하에서 차선의 교육 효과라도 거두고자 한다면, 소규모 강좌를 표준 모델로 삼아야 한다. 정상수업에서도 부담스러울 대규모의 학생들과, 모니터로 몇 페이지의 출석 화면을 넘겨가며 소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통 없는 강의로는 공동체와 학문의 미래를 추구할 수 없을뿐더러, 당장 교강사와 학생의 현재조차 담보하지 못한다. 규모를 언급하지 않은 교육부의 발표는 수업의 가치를 비용으로 환산하는 사립대학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샅바를 쥐어준 격이다.
교육부는 원격수업이라는 신기루를 쫓아 현장 실습을 AR/VR로 진행하고 K-MOOC을 확대하겠다고 하였는데, 고등교육 혁신이라는 표현을 고등교육 부정의 뜻으로 사용하는 언어도단이다. 대학에서 원격수업으로라도 진행할 수 있는 강좌와 그렇지 못한 강좌에 대한 분석도 없고, 원격수업을 어디까지 확대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검토가 없다. 대학의 교육과정과 시설 자원공유 실적을 대학기본역량진단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데, 여건이 다른 대학 간 협력의 조건을 합의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서류 조작만을 양산할 것이다.
교육부는 대학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9월 9일의 발표를 취소해야 한다.
코로나19의 고통을 분담하는 정책을 이제라도 고등교육 구성원들과 함께 의논해야 한다. 대학들도 현재의 위기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자신들도 고통 분담의 주체임을 자각해야 한다. 교육부와 대학이 이익 추구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이, 교강사와 학생들만 고통을 전담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된다면, 먼저 고등교육에서의 방역 전선이 붕괴되고, 다음에는 고등교육이 붕괴될 것이다. 2020년이 한국 고등교육 암흑기의 출발점으로 기록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0년 9월 14일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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